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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옛날, 내 편이라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컴컴한 어둠 속에서 빛 한 줄기를 보았다. 나는 내게 닿은 마지막 신의 손길이라고 생각하며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허나 그의 따스한 빛 아래 사는 이가 나 하나뿐이길 바라는 것은 소인배의 몹쓸 차청차규借廳借閨의 행동 같아 그저 한 줄기 빛으로 몇 년을 버텨내었다.


그 빛마저 나에게서 떠나고자 고해왔던 것은 어느 무더운 여름이었다. 강한 볕에 탐스럽던 꽃마저 물러져 갈 때에, 열기가 화끈화끈 올라오는 돌계단을 맨 손으로 짚으며 전장으로 가겠노라 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어제의 일인 양 눈에 선하다.


* * *


"상장군 김 신,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변방에서 급히 지원을 요청하는 기별이 왔습니다. 한 시라도 빨리 출정해야 하는 것이 옳다 생각되어 이리도 급히 폐하를 마주해 섰습니다."

"그대가 꼭 가야겠는가."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신에 여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신이 내민 관보에 싸인 것을 받아들었다. 이립而立의 나이는 지난 지 한참, 벌써 강사强仕를 바라보고 있는 그가 대체 왜 스스로 전쟁터에 가겠다 고집을 피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는 여전히 돌계단에 납싹 엎드려 있는 신의 손을 친히 잡아 올렸다. 신은 안절부절 내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며 천천히 일어서는 여를 따라 일어서 그를 마주보았다.


"오늘, 침전에 와줄 수 있겠나."


담담한 말투임에도 어찌 그 눈은 뭔갈 예견한 듯 슬퍼보여 신은 거절할 때에 종종 꺼내들던 '신하의 도리'에 대해서는 얘기도 꺼내지 못하고 수락의 뜻을 내비치는 수밖에 없었다.


휘영청 달이 뜬 자시子時, 신은 여가 부탁했던 대로 움직였다. 여가 종종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다녔던 길인지 사람의 발길로 닦아져있는 샛길을 지나자 얼마 가지 않아 여의 침전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마치 이때에 제가 올 것을 알기라도 한 듯이 나인이며, 근장까지 모두 물려놓은 것에 감탄하며 신은 조심스레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무슨 연유로 이 늦은 밤에 저를‥"

"말을 놓으라. 이미 짐이 한 짓을 모두 보지 않았는가?"

"허나,"

"오늘만 그리 하거라. 어명이다."


어명이라, 신은 그럼에도 여전히 망설였다. 조금 억지를 부려 어명이라 덧붙였건만 어차피 듣지 않을 신임을 알았다. 신이 한동안 말이 없자 여는 품 속에서 몰래 들인 백자 주병을 꺼내들었다. 곧이어 이불 밑에선 잔이 나왔고 신은 그 모습에 짧은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일국의 황제라 불리는 이가 품에는 주병을 침소에는 잔을 꿍쳐둔 꼴이라니, 음주 하나에 꼭 말아야 할 짓을 하는 것만 같아 기분이 묘해졌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벌개져서 연신 기침만 해대는 신을 향해 여는 잔과 주병을 내밀었다. 곧 웃음을 삼켜낸 신은 예를 갖추고 주병을 받아들어 잔에 술을 반에 미처 못 미칠 정도 따랐다. 여는 내밀었던 잔을 다시 앞으로 끌어당겨 안을 들여보더니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짐을 무시하는 것인가."

"쓸 겝니다."


어찌 보면 무시하는 것이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으나 그의 말에 들어맞지 않는 구석이 있었던 적은 없었기에 여는 잠잠히 신이 준 양만큼의 술을 입에 털었다. 주병을 받을 때부터 훅 올라오는 알싸한 향에 신은 틀림 없이 독하다 생각했었고 그것이 사실임을 확실히 드러내주는 여의 표정은 가히 볼만했다.

황제라 하나 역시 어리구나. 신은 보이지 않게 살풋 웃곤 잔을 달라는 의미로 여에게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보였다. 허나 돌아온 잔에는 신이 여에게 따랐던 술의 양 정도만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잠시 당황한 신이 잔을 내려보고만 있자 뒤로 여의 장난기 섞인 말이 따라붙었다.


"그대에게도 쓰지 않겠는가?"


과연 먼 길 고배가 되겠습니다. 신은 긍정으로 나지막이 대답하고서 짧은 숨으로 술을 넘겼다.


하나의 잔으로 입을 맞대고 한 모금씩 넘기기를 얼마나 하였을까, 여는 어느새 얼굴이 붉어져서는 신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가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진정‥."

"모두 폐하의 고려를 위한 일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나의 고려라‥.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 신의 모습에 여는 신에게서 잔을 뺏듯이 받아들어 목으로 쓴 술을 한 번 더 삼켰다. 매번 승전을 알리며 당당하게 입궐하던 신이었지만 마지막일 것 같은 느낌에, 정말 다시는 보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에 이번만큼은 정말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너무나도 컸다.


해가 밝고 곁에는 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술에 잠이 들었던 여의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복장을 갖춰입고 사람 몇과 편전으로 향하니 그 앞엔 신을 선봉으로 변방으로 갈 병사들이 이미 열을 갖추고 여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전하겠나이다."

"꼭, 그리하여라."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던 입을 열어 겨우 뱉어낸 말이었다. 한 번의 돌아봄도 없이 멀어져 가는 신의 모습을 여는 북받치는 감정을 주워담고 눌러담으며 끝까지 지켜보았다.


*


그렇게 갔던 이가 가슴에 제가 쓰던 대검이 꽂힌 채, 싸늘한 주검이 되어 곁으로 돌아왔다.
세상과 나를 비추던 따스한 빛을 잃은 채, 그렇게 돌아왔다.


"김신...?"


그리고 몇 백 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다시 마주하게 된 얼굴이었다. 아직도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그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게 되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신, 그대는 잊었을 지 몰라도 나는 한 순간도 잊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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