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고색

길가의 노란 등은 오후 8시 즈음이 되어야 켜진다. 해는 길어진 지 오래고 낮 공기는 뜨끈하게 달아올라 저녁에야 겨우 식어 미지근해진다. 나는 수퍼 앞 평상에 다리를 달랑거리고 앉아 시커먼 골목 안을 응시했다. 골목 안을 아주 집중하여 쳐다보고 있으면 가장 안쪽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듯이 느껴진다. 때로 꿈틀거리는 괴물이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잡아먹을 것 같...

"그런 제안에 흔들리다니, 나도 망할 만큼 망했구나." 대면하지 않은 며칠 사이 서영의 머리칼은 더욱 하얗게 변해 있었다. 잦은 탈색에 뻣뻣해질 대로 뻣뻣해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손마저 전보다 마디마디 뼈가 도드라져 있었다. "지 대표, 탈색 좀 그만해. 그러다 진짜 상해.""... 연습실에 갔었어. 아이들이 참 예쁘더라. 대표님, 대표님 하면서 인사를 그...

1. 그들의 사랑에 불을 붙인 건 무엇도 아닌 그저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다 자란 어른이면서도 여름의 청량한 색감 속 잠깐 맞은 눈에, 한창의 청춘처럼 순식간에 타올랐다. 서로를 오감으로 받아들이고픈 마음에 성급히 안았고 끈적한 여름 더위처럼 녹아 스몄다. 쉽게 붙은 만큼이나 쉽게 꺼질 줄 알았던 그것은 꺼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오 년, 사랑만 했다. 2...

그들이 나를 애타게 부른다. 반장님, 어디 계세요! 빨리 와주세요. 온몸으로 검은 사내들의 주먹을 받아내며 마구 울고 있다. 2018년. 88년을 뒤로한 채 깨어났다. 하지만 눈만 감으면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는 그들 목소리에 고통만 커져갔다. 매일 아침 울며 몸부림치다 깨어났고 현실에는 감각이 없다. 돌아가고 싶다. Someday I'll wish upon...

이거, 꿈이잖아요. 그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 돌아가고 싶다. 2018년으로, 나의 집으로‥. 단단히 결심하고 올라왔음에도 꽤나 높게 느껴지는 인성시 서부경찰서의 옥상. 슬핏 본 아래에 아찔한 감각이 스쳤다. 바람과 맞닿은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꿈인데 대체 뭐가 두려운 거지? 태주는 다시 한 번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서울놈. 거기서 뭐 하냐?" ...

온기 하나 없는 사택. 방 한 가운데에 벌렁 드러누워 있는 사람은 동철이다. 켜놓은 텔레비전이 열심히 떠들지만 그의 세상은 소름 돋을 만큼 조용하기 그지없다. 천장만 뚫어져라 보고 있자니 텔레비전이 드디어 맛이 갔나보다. 지지직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더니 이내 채널을 제멋대로 바꾼다. 그리고 그리운 그 놈의 목소리가 들린다. 계장님, 계장님! 한태주.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