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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해."


몇 십 년이고 몇 백 년이고 앓기만 했던 사랑을 고백했다. 눈앞이 새카매지고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마주선 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어지러이 얽혀들었다. 여의 애절한 눈빛이 신에게 닿자 아예 대답을 않으려던 신은 입술을 달싹였다.


"‥ 난 아니야."


여의 고개가 절로 수그러들었다. 침묵하던 신은 그대로 돌아서 자리를 피했다.


* * *


 언젠가 기뻐했던 동거이다. 도깨비와 그를 사랑하는 저승사자, 고려의 상장군 김신과 그를 죽인 황제 왕여의 발칙한 동거일지라도, 따스한 말 한 마디 오고 가지 않는 말라 비틀어져버린 동거일지라도, 여는 기뻐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어젯밤의 일로 둘의 사이는 수분이 다해 말라 비틀어진 데에조차 그치지 못하고 바스라졌던 것이다.


여가 출근한 후 신은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어제의 일을 곱씹는다.

'‥ 난 아니야.' 그리고 무너진 표정, 탁해진 눈빛, 떨리는 손. 그럼에도 그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신과 그 혈족,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지옥으로 밀어넣었으니까. 코끝에 달은 진득한 피냄새만이 더 강해질 뿐, 그 순간은 세월이 지나도,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여는 신에게 남은 상처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 있을 터이다. 그러고도 사랑을 갈구하다니 그 순수한 사랑에 경멸감이 들고 만다.


거대한 저택 현관, 하얀 색의 계단에 주춤주춤 앉는다. 여는 하염없이 우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처럼 군다. 어제의 일이 스멀스멀 살아나 몸을 잠식해간다. 곧 여의 머릿속은 그로 가득찬다. 그의 분노가 사그라들길 기다리며 이 뜨거운 감정을 식히고 또 식히고 기다렸다. 이제라면 괜찮겠지, 그리고 고백을 했던 것이었다. 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휴일이건만 출근을 핑계로 자리를 떴던 여는 옛날의 그 따스한 눈빛이 그리워 미칠 것 같다.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자 그는 다신 볼 수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간다.


"김신‥!"


신이 소리가 들린 현관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여의 두 눈과 마주한다. 아직까지도 싸늘하게 식어있는 눈빛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다. 신은 여가 한동안 말을 잃고 서있자 여느 때처럼 자리를 뜨려고 소파에서 일어선다. 여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인다.


"자꾸 피하려고 하지마."


하, 짧은 감탄소리가 퍼져나간다. 안에 담긴 의미는 충분히 이해가능하다. 어이가 없거나, 짜증스럽거나, 혹은 둘 다.


"피하지 말고, 제대로 해봐?"


날선 말로 말문을 여는 신의 눈가도 조금 달아오른다. 그 스스로도 얼마나 아픈 말들을 뱉어낼지 이미 인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이 원치 않는 사랑을 완벽히 밀어내기로 단단히 결심한 후이기에 말을 잇는다.


"하지 마. 사랑, 그거 하지 마. 그따위 것 받고 싶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제발, 모르는 척 지내자. 그 가증스런 사랑 노래를 더는 들어줄 마음이 없어."


여의 말라가던 두 눈에 다시 눈물이 한가득 고인다. 여와 신은 모든 관계를 청산한대도 부정할 수 없이 동거인이다. 모르는 척 지내자. 이것은 최소한의 관계를 유지하게끔 하려는 신의 노력인 것이다.


"사랑해, 사랑하는데 어떻게 해. 네가 있는 곳이 아니면 숨을 쉴 수 없어."


여의 몸체가 잘게 떨리더니 죽어버린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신은 자신 앞에 몸을 웅크리고 오열하는 여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오늘따라 유난히 가냘파 보이는 몸통이 꺼떡꺼떡 움직이다가 한순간 멈춘다. 고개를 든 여와 신은 다시 눈을 맞춘다. 여의 눈은 눈물로 탁하게 흐려져있고 신의 눈은 붉지만 싸늘하게 식어있다.


"널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죽어‥."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애절한 사랑대사다. 하지만 일말의 동정도 일지 않는다. 신은 대답한다.

차라리 죽어줘. 그렇게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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