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라에 부탁해 여의 관할 구역을 아예 캐나다 한인타운으로 옮기면서까지 여를 캐나다에 데려가야만 했던 신은 퀘벡에 유덕화 옆, 유신재의 이름으로 묘를 하나 더 세우고서 또다른 이름으로 300년 만에 캐나다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훅 끼치는 먼지에 신과 여는 옅은 기침을 내뱉곤 안으로 들어섰다.


300년 만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새삼 또 낯선 서재에 당시 종이 뭉텅이 새에 아무렇게나 꽂아놓았던 집문서를 찾기 위해 둘은 열심히였다. 그것을 찾아야 신神에게 들고 가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이 집에 왔음을 알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귀찮고 또 멍청하고 불필요한 절차였다.

"어라, 너 이거 아직 갖고 있냐?"

책장을 뒤지다 신이 꺼내든 것은 지나온 오랜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너덜너덜 누렇게 바랜 종이 뭉텅이였다. 과연 깔끔한 성격의 여답게 한 상자에 연도별로 라벨이 붙어 모아져 있었다만 신의 심기를 불변하게 만든 이유라면 그것들이 담은 것이 모두 사랑 얘기였다는 것이다. 신은 얼굴을 팍 구기며 그중 한 장을 신경질적으로 펼쳐들었다.

"때때로 벽락이 쳐서 무간지옥에 떨어져 바로 죽어갈 내 몸이 내 임을 두옵고 다른 임과 걷겠습니까?"

"연서 아니야!"


어어, 연서~ 하는 사념이 여의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자 여는 소리를 빽 지르곤 신의 손에 들린 것을 뺏어들어 다시 상자 안으로 넣었다. 물론 연서가 아니었다. 연군지정戀君之情 시가였으니. 하지만 그것들조차 신에게는 더없이 불쾌할 뿐이었다. 게다가 몇 백 년이나 지난 오늘까지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 신을 더욱더 날카롭고 예민하게 만들었다.

"이 양반들이 말이야. 그 시간에 나라 정세나 좀 살피지, 사랑해요, 충성해요, 연서나 쓰고 있어!"

"아니‥,"

여가 뭐라 반박하려 입을 떼자마자 신은 뭔가를 발견하였고 어이가 없다는 듯 하!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선 그것을 손에 꼭 쥐어들고는 여를 노려보았다. 겉으로 붉은 꽃송이가 하나 그려져있는 그 종이를 보자마자 여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1273年], 딱 붙은 라벨조차 여에게 그가 뭐 됐단 사실을 부정하지 못 하였다.

막 원에서 여를 쥐고 흔들기 시작한 시기였으며 또한 신은 한창 일日 원정을 준비하느라 바쁜 시기였다. 한 마디로 연군지정이라며 종종 올라오는 것들 또한 나라만큼이나 관리되지 않았단 것이다. 또 틈만 나면 원나라 사신 앞에 나체로 뉘어져 밤새 수치스러운 짓이나 당하던 어린 황제를 그 누가 높아 보겠는가 말이다. 덕분에 그즈음에 그를 향한 모든 것들은 연군戀君을 넘어 외설적이 되어갔었다. 심지어는 원의 만행 이전에도 신이 있는 전장에서 폐하의 얼굴이 희고 곱니, 몸이 여린 것이 밤 상대로 해볼만 하다니느니, 온갖 말이 오갔다니 그럴 만도 했다.

"황제라커늘 창호 속 가려 볼 수 없노라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 하니 창호조차 국화꽃이 아른이 새겼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가 하노라."

아아, 살송곳.

여는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붙잡고서 신의 손에서 그것을 뺏어들었다. 신은 와, 하고 비꼼을 가득 담아 감탄하고서 삐딱하게 팔짱을 껴 섰다.

"왜 아직 갖고 있는데. 그거 가지고 밤에 혼자 하시기라도? 아아, 아니지. 사헌부 지평이 한 송곳 하시긴 했지."

"자꾸 이상한 소리 말고 더 찾아봐. 그대 것도 있어‥."

여는 수위 조절 따위 하지 않으며 쏟아지는 신의 질책에 홧홧하니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남은 손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신이 보낸 것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른 것들처럼 연도별로 모아진 것이 아니라 따로 내어져 있었다. 글을 쓸 때마다 연월일을 재깍재깍 쓰는 신의 버릇도 있기로서니 라벨엔 연도 대신 김신이란 이름이 적혀있었다.

"네 것은 진짜 연서였잖아."

박중헌이 들춰볼지도 모르는데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 여는 신이 꺼낸 것을 받아들어 날짜를 흘끗 보더니 도로 눈을 마주 보고 읊기 시작하였다.

"늘 푸른 청산은 내 마음과 같고 잠시도 쉬임없이 흐르는 시냇물은 임의 정과 같도다. 시냇물이야 흘러가 버리지만 청산이야 별할 수 있겠느냐?"

분명 신이 올렸던 것들 중 하나였다. 양반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나 잘났다며 써내리는 시조, 저도 쓰고 싶어 틈틈이 글공부를 하고 또 해 마침내 써내린 것이었다. 신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죽 읊은 여를 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다 외웠네."

"그만큼 그렸어."

여는 손에 들렸던 돌돌 말린 것들을 모두 상자 안에 내려두고 다시 그때의 감정으로 돌아간 듯 신의 얼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네가 이것들 버리려 했을 때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분명 안에 제 것도 들어있을 터인데 보기 싫다며 험하게 다루더니 곧이어 버리겠다며 난리를 치는 신에게서 겨우 지켜낸 것들이었다. 그러나 신은 전혀 감흥이 없는 듯 다시 한 번 돌돌 말린 그것들을 흘기더니 한참 익던 분위기를 깨고 앙칼지게 말했다.

"그럼 내 것 빼고 다 버려. 특히 아까 그것."

"싫어."

생각지도 못하게 빠르게 돌아온 단호한 여의 대답에 신은 주춤하다 곧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왜 싫은데. 뭐, 사헌부 지평? 신의 온갖 사념이 여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자 여는 한숨을 푹 쉬곤 신의 눈을 마주 보고 아이를 가르치는 마음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한텐 촉진제야. 무능하였음을, 또 어리석었음을 스스로에게 일깨우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기도 하고. 항상 자만하지 않도록 하는 거야."

일국의 황제가 창호와 살송곳에 댈 그것이 되는가, 감히 마주하지도 못할 것이었다만 저리 밑보였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척, 담담하게 설명하던 여는 다시 치미는 감정을 차마 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으며 신의 품에 안겨들었다. 신은 갑작스런 여의 감정 변화에 당황하면서도 저에게 안겨드는 여를 도리어 더 꼬옥 안아주었다. 나에게는 그저 흉하게 남은 상흔일지 몰라도 아직 너에게는 핏물 고인 상처구나.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창호래도 그 위로 두터이 감싼 재가 그대니 몇 번이고 찔리어도 아프지 않음에 틀림없다."

"안을 비집고 들어간 꽃에 미소 지어 보겠습니다. ‥ 그리고, 피워보겠습니다."

신의 품에 눈물을 문질러 닦은 여는 신의 대답에 바람빠지는 소리로 웃으며 마주본 얼굴에 두어 번 입술을 맞대었다.

"고마워. 또‥ 혹시 지금이라도 피워보려면 말하고."

"내일은 꽃놀이 가야겠다."

아마 좀 이른 꽃이 많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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