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제


때는 고려, 꽃샘추위도 지나고 춘春이라 불리는 계절이 완전히 돌아온 시기였다.


"조용히 감찰을 나가지."


나직한 목소리가 궁에 울렸다. 이 나라의 유일무이 태양, 왕해王楷였다. 그는 나라가 안팎으로 시끄러우나 백성 돌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다른 쪽으로도 힘을 써 연구소를 설치한다거나 역사서 따위를 편찬하곤 했다. 필시 후세에 이름을 길이 남길 성군이었다.


"호위무사 하나면 충분하구나."


사실 해는 감찰보다도 도성 밖으로 가벼운 산책을 나가고 싶었다. 따라붙는 호위무사는 이미 그 사실을 안 후였다. 그는 작게 웃으며 해에게 속삭였다.


"이번엔 들로 가시렵니까."


그럴 것 같네. 해는 그와 눈을 맞추고 살짝 웃어 보였다.


도성 밖으로 나가자 숨통이 트였다. 신이 나 걸음을 빨리하니 금세 민가를 지나 푸른 들에 다다를 수 있었다. 뒤로는 산을 두고 앞으로는 민가를 두었으니 경치를 즐기며 백성들도 살필 수 있어 참 좋은 곳이었다. 또 풀 외에도 들꽃이 피어있어 자연을 사랑하는 해에겐 이곳이 즐겁기 그지없었다.


해가 들꽃을 하나 꺾어 손에 쥐려는 순간, 누군가 긴 풀을 헤치고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해는 숙였던 몸을 일으켰고 호위무사는 숨겨뒀던 검집으로 빠르게 손을 뻗어 당장이라도 그를 칠 기세를 내비쳤다. 해는 저지의 뜻으로 제 손을 호위무사의 손 위에 살며시 덮으며 어느새 자신의 곁에 다가와 있는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용무를 말하라."


호위무사가 그를 다그쳤다. 그는 기세에 조금 움츠러들었지만 이내 미소 지으며 답했다.


"단지 그 꽃을 꺾지 않으셨으면 하여 말입니다‥."


해는 작게 웃었다.


"꽃이 너무나도 어여뻐 동하고 말았소. 미안하오."

"아‥. 것보다 그 꽃은 들양지꽃이라 합니다."

"꽃에 박식하신가 보오."

"누이가 꽃을 좋아했습니다."


해가 감탄하며 그의 이름을 물으니 왕여王黎라 소개하였다. 올해로 겨우 약관의 나이가 된 젊은 청년이었다.


그 일 이후 해는 그가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감찰이랍시고 나가는 산책은 죄다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또는 종종 여가 일한다던 약방에 들러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러면 황후가 그 사내와 정분이라도 난 줄 알겠다며 몹시 심통을 부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혹시 태보太保를 해볼 마음은 없소?"

"예? 선비님께서 그런 높은 직에 어찌‥."


해는 태보 자리에 여가 앉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해는 어렸을 적, 자신의 태보를 떠올렸다. 박중헌, 박학다식하나 욕심이 많아 결국 숙청당하고 만 그. 하지만 이 청년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었다. 멍하니 굳어있는 여의 얼굴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쪽이 황제라도 되나,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지도 몰랐다. 태보는 태자를 가르치는 선생이고 그 명성에 걸맞게 황제의 종친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으니. 여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훑어보자 해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내가 황제만큼이나 힘이 셀지도 모르오."




2. 태자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따라나서 궁에 당도하게 된 여는 입이 딱 벌어졌다. 무언가 이상하다 했더니 궁으로 들어서자마자 폐하, 하며 제 옆의 이에게 따라붙는 자들이 대체 몇인가.


"정녕‥"

"어떠시오, 나."


장난스레 웃어 보인 해는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여를 동궁東宮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보였다.

그들은 뜰이 있는 한 별궁 앞에 멈추어 섰다.


"신아, 나와보거라."


해가 아무리 불러도 답이 없자 뒤를 따르던 신하 하나가 쪼르르 달려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얘는‥ 또 어딜 간‥"


분명 기다리라고 했건만.

그가 말을 잇지 못하자 여도 덩달아 당황했다. 혹시나 싶어 주위를 휙휙 둘러보니 뜰 안쪽에서 무언가를 잡고 있는 조그만 아이가 보였다.


"폐하, 혹시 태자 전하가 아닐는지요‥."


빠르게 선비님에서 폐하로 호칭을 갈아탄 여가 아이를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아, 맞소."


해는 쯧쯧 혀를 차더니 직접 아이를 끌어와 여 앞에 세웠다. 아이는 몸을 배배 꼬며 해의 도포자락에 매달렸다. 그러다 고 순진하던 눈빛이 돌연 바뀐 것은 여가 한참이나 제 아랫사람일 것을 직감한 후였다. 신은 도포자락을 놓고 여 앞에 삐딱하게 섰다.


"이름이 뭐야?"

"왕여‥ 입니다."


해는 아이의 삐딱한 자세에 불만인 듯 미간을 세게 짚더니 상황을 무마하려 입을 떼었다.


"이 아이는 왕신王侁.

그리고 신아, 이자는 이제부터 네 선생일 것이다."

"당치도 않습니다! 소신이 무얼 안다고‥"


여가 선생이란 소리에 놀라 팔짝 뛰자 해는 조금 생각하는 모양새를 했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딱 튕기며 하는 말이,


"어명일세."




3. 태보


내일이면 궁으로 가 꼼짝없이 태자 전하를 가르쳐야 할 상황이었다. 어명이라니. 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침부터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흰 저고리와 바지의 편한 차림으로 있던 여는 놀라 입을 뻐끔대었다.


"선생을 뫼시러 왔소."


이건 뫼시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 기분이 상한 여가 나지막이 답하자 그들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더니 발을 한 걸음 물리었다.


궁에 당도하자 친히 여가 오는 길에 나서 반겨주는 해에 여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묘한 장면을 보는 나인들 사이의 기류가 심상치 못하였다.

새로운 세력의 등용이다, 탐탁지 못한 세자 대신 인재를 찾은 것이다, 숨겨진 측근이다, 성이 왕 씨라던데. 이제 그 소문은 입에 입을 타고 온 궁에 퍼지게 될 것이다. 해는 그 쑥덕임을 듣지 못한 것인지 마냥 표정이 밝기만 하였다.



"신아, 태보께서 오셨구나."


신은 여전히 여에게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간밤에 오간 말은 있었던지 삐딱하게 굴진 않았다. 해는 작은 목소리로 안녕하시오, 하고 인사하는 신의 모습에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역시 해가 억지로 시킨 일이었던지 인사를 하자마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돌멩이를 집어 들어 노는 신이었다. 여는 그런 신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어차피 이리 된 것, 태자를 가르쳐야 할 것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여는 문득 걱정이 되어 고갤 들었다.


"소신이 천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 했습니다.

학문에 대한 것은 떨어짐이 말할 바도 못 되는데 말입니다‥"


해는 그 근심에 가득 찬 얼굴을 마주하더니 뒤에 서 있던 한 늙은 신하를 불러들였다.


"태사太師."


그는 복두 아래로 희끗희끗 보이는 흰머리를 끄덕이며 앞으로 한 걸음 나와 보였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고 빛나는 눈은 그가 여느 젊은이 못지않은 욕망을 갖고 있단 걸 보여주었다.


"태자의 실질적 교육을 담당할 것이오. 외에도 돕는 이가 많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태사 조우趙祐라 하오."

"왕여라 하옵니다."


해는 그들의 통성명을 지켜보다 걸음을 돌려 동궁 밖으로 향했다. 그의 입꼬리엔 은은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태‥, 태자 전하‥. 무엇부터 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첫 일주일 간은 이런 식이었다. 이러니 혹여 해가 여를 불러다가 오늘은 무엇을 공부하였소 묻기라도 하면 답할 거리가 없어 곤란해지곤 하는 것이었다.


신이 경계를 풀어가는 열흘 즈음에는 이런 일이 생겼다.


"나들이 가자."

"예‥?"

"듣자 하니 풀을 잘 안다며?"


그렇게 나서게 된 첫 나들이였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싶을 정도로 임건전臨乾殿을 벗어난 신의 행동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후원에 가득 나있는 긴 풀들 사이를 오리걸음으로 헤쳐가나 싶더니 어느새 연못께에 가 물고기 구경을 하고 있곤 했다.


"전하, 힘들지 않으십니까."


여가 숨을 고르며 신에게 묻자 그는 장난스런 얼굴로 고개를 살살 저었다. 쉴 마음이 없단 것이다.

아‥.

뒤에서 따라오던 태사 어른의 얼굴 낯 또한 어두워졌으리란 건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팔팔한 스물의 여도 따라가기 힘든 아홉 살의 체력을 머리 희끗한 태사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그래도 다행히 주황색 물고기는 어디 있냐는 둥, 물고기는 무얼 먹고 사냐는 둥, 온갖 가지 질문을 해대며 신은 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임건전으로 돌아오고 난 후였다. 오는 길에 이제는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겠다며 재잘거리던 신은 여가 내민 책엔 눈길도 주지 않고 넌지시 말을 건네었다.


"태보, 힘들었어?"

"아니옵니다."

"바른대로 고하라!"


저런 말은 어디서 또 배워 오셨으려나. 아마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을 고대로 보고 배웠으리라. 여는 웃음기를 감추지 못 하였다.


"송구합니다."


결국 여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하자 신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손을 뻗어 책을 집어 들었다.


"전하, 오늘은 이것의 반의반만 해도 좋을 것입니다."

"좋다."




4. 소원


신이 열두 살이 되던 해였다. 공부엔 영 아닌 듯싶었으나 교육은 지속되어야 했으니 여는 그에게 딱히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태사의 수업에조차 건성건성 따르지 않는 듯한 걸 알게 됐으매 여는 특별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책거리(쓴-학생이 책 한 권을 다 읽거나 떼게 되면 선생과 동료들에게 한턱내는 것)라고 아십니까?"

"응."

"그런 걸 하려고 합니다.

물론 대접하는 쪽은 제 쪽이고요."


무얼?

신이 그렇게 묻자 여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궁에는 없는 것이 없다. 설사 신이 원하는 뭔가가 당장에 없더라도 손짓 하나면 모두 해결될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왕위일지라도‥. 그래서 여는 어떻게 하면 신을 수업에 잘 참여하게 할 수  있을까 보다도 무엇을 보상해줘야 할지를 더욱 오래 고민했다.


"‥ 소원입니다.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좋다."



처음에 태사는 이것을 반대했다. 태자에게 여의 지분이 커질까 두려워 수업에 제대로 참여하게 해달라 했던 것인데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이 보고는 왕을 거쳐 여에게로 하달되었고 결국 여는 이를 해결하겠다 나섰다.


태보 왕여가 꺼내든 카드는 유치하게도 소원. 황당무계 멍청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먹혔다. 것도 아주 제대로. 여가 잘 간파한 것이었다. 어린아이에게 소원이란 원하는 게 나오는 신비한 보물상자와 같다는 걸. 



"오늘부터 불유 삼장경三藏經과 교장敎藏 을 순서로 나갈 것입니다."


수업을 알리는 우의 말소리에 신이 뜨인 눈으로 쳐다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곧장 나타난 이 변화가 우에겐 낯설 뿐이었지만 신은 이것이 일상이라도 되는 듯 초연하게 자리를 지켰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나가던 진도는 눈에 띄게 빨라졌다. 한 쪽마다 한 번은 도망 나가던 신의 엉덩이가 풀이나 발린 듯 붙어있었던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공부를 시작한 이래로 신은 제 머리칼을 쥐고 뜯는 한이 있어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신이 종종 어른스런 말을 던질 때에면 비단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한 척은 자랐음을 실감하곤 했다.



"오늘 삼장경을 끝냅니다."


우의 말에 신이 들떴다. 오늘이면 소원이다. 신은 수업이 끝나자 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듯 여가 기거하는 곳으로 달려나갔다.


"태보!"


그 어린 목소리가 마당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울리어대자 여는 미처 옷매무새를 정리할 겨를도 없이 달려 나왔다. 워낙에 다급한 목소리인지라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었더니 다행히도 그의 얼굴은 활짝 피어있었다.


"오늘, 삼장경 끝났어."


신이 여에게로 그리도 전하고 싶었던 말이 이것이렸다. 그 목적이 뭔지는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여는 흐트러진 옷을 매만지며 입을 떼었다.


"그럼 경經에 한 줄, 율律에 한 줄, 론論에 한 줄 읊어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신은 생글생글 웃는 낯을 순식간에 지우고 여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런 거 몰라."


감탄할 정도였다. 이 아이의 이중성은. 순간 끼친 한기를 잡아내려 팔을 문지른 여는 한 걸음 물러주기로 결정했다.


"다음부터는 익혀오셔야 합니다. 처음이니까 봐드리는 거예요."


신은 그제야 굳어있던 얼굴에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무슨 소원을 빌고 싶어 저리도 열성일까.


"무슨 소원 빌으시려구요?"

"음‥."


그냥 소원을 갖고 싶었던 것인데.

신이 말하기를 망설이고 있자 여는 눈을 끔뻑이다 조심스레 말을 꺼내었다.


"아직 못 정하셨으면‥"

"아냐!"


신은 한참 동안 어, 어, 하며 발을 동동 구르더니 아, 하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여와 눈을 맞추었다.


"태보가 칭찬을 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칭찬에 인색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한참을 생각하던 여가 어떤 칭찬을요? 하며 묻자 신은 발간 볼을 툭툭 두드렸다.


신이 여섯인가 일곱 살일 적이었다. 어린 마음에 형님 폐하가 너무 보고파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향했는데 폐하가 황후의 볼에 입맞춤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형님 폐하."

"어, 어?"

"그것은 왜 하는 거예요?"


해나 황후나 적잖이 당황했으련만 곧 웃음을 띠며 대답하였다.


"칭찬하는 것이란다.

예뻐서 칭찬해주는 것이야."


해가 눈가를 예쁘게 접어 황후에게 웃어 보이자 그녀도 따라 웃음 짓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는 그가 원하는 바를 바로 알아차렸다.


"안 해줄 거야?"


신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그렇게 물었기 때문이었다. 여는 고갤 숙여 신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마주 대었다. 칭찬이란 거, 좋은 거구나.


그리고, 둘 사이의 칭찬은 항상 그 가벼운 입맞춤이 되었다.




5. 여지


"오늘도 칭찬받고 싶으신 거예요?"

"응."



신이 커가며 그렇게 마음은 두터워져만 갔는데, 누구도 몰랐다.

그게 좀 일반적이지 않은 감정이구나, 싶었을 때는 이미 너무도 깊어진 후였다. 일 분 일 초라도 더 보고 싶은 게 예사 마음은 아니었구나. 감정이란 걸 알게 될수록 신은 곧장 멈출 것처럼 느리게 뛰는 심장 때문에 괴로워졌다.



"너, 오늘 내 침소에 들어."

"예, 전하."


때가 지났으니 하루빨리 태자빈을 맞으라는 해의 말 따위 들리지 않았다. 매일이고 매일이고 여와 수업을 치른 날이면 아무 여인이나 불러 밤을 지새웠다.


사필귀정, 사필귀정‥, 책 한 귀퉁이가 닳도록 새기며 한순간의 일탈이겠거니, 그랬던 것은 며칠이고 몇 달이고 지속되었다. 쑥쑥 빠지던 책 진도가 느려지는 것은 당연하듯 따라오는 인과응보였다.




6. 꿈


쨍-.

아침 바람이 차운 어느 이른 아침, 별안간 동궁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동궁 사람들이 그곳을 둘러싸고 구경꾼 마냥 몰려들었다. 마당에 사납게 흩어진 사기 조각을 본 여는 생각했다. 겉보기로나마 존재하던 평화로움도 이젠 끝이구나.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출처를 알 수 없는 작은 탄성과 함께 웅성거리던 소리가 훅 줄어 들어갔다. 빛이 새들어가는 침전의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인영이 있으니, 신이었다. 그의 눈은 반쯤 미쳐 있었다.


"전하."


여가 그를 부르자 날카로운 눈빛이 쏟아졌다. 가까워질수록 깊이를 더해가는 싸늘한 눈빛이 여의 숨통을 조여오는 듯했다. 어쩌면 책망이 들어있는지도 몰랐다. 신은 눈을 떼지 않은 채 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시선이 고정된 곳은 다름 아닌 여의 어깨였다. 신은 여의 어깨 부근 옷을 잡고 세게 끌어내렸다. 신의 동공이 커졌다. 그는 고려 사람답지 않게도 흰 피부를 가져 드문드문 점이 있는데, 그것은 아무나 가질 특징이 아니었다.


"그자다."


꿈에서 봤던.


분명 자겠다고 침전에 누웠는데 그 위에는 하얀 나신이 걸터앉아 있었다. 어두운 탓도 있지만 기억력도 한몫해주어 어디서 본, 어느 여자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길게 뻗은 팔다리와 가늘고 곧은 허리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그게 연기처럼 흩어지는 순간, 꿈인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꿈에서 깨자 팔다리니, 허리니 기억이 하나둘 사라져가 어느새 아예 없어져 있었다. 신은 잡히는 대로 무얼 던졌다. 그러나 깨진 사기 파편을 보니 뇌리에 세게 박혀든 게 있었으니, 특이하게도 유난히 흰 피부와 목에서부터 어깨까지 이어진 점들이었다. 예사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여기 있다. 설마 했건만. 그러니까, 꿈속의 그 여인은 그 누구도 아니고 그의 태보, 왕여였다. 신은 본인이 뱉은 말에 경악하고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내가 이 사람을 진짜 사랑하나. 아직도 사랑하나. 결국 먼저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와버린 건 신이었다.


"전하!"


내관이 입으론 신을 부르고 손으론 여를 잡고 흔드는 둥의 호들갑을 떨었지만 여는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있을 수밖엔 없었다. 신이 꾸었다는 꿈이, 무슨 꿈이었을까.


자리를 피해 멍하니 걷던 여는 어느새 신과 거닐었던 연못께로 다다라있었다. 단지 걷다 보니 발이 여를 그곳으로 이끌었을 뿐이었다. 신이 없더라도 관리는 지속해온 탓에 여전히 그 자태는 아름다웠다. 연못께에 꿇어앉으니 투명한 물에 제가 비쳤다. 벌어진 옷 사이로 허옇게 드러난 속살이 눈에 띄었다. 아파보인다고 싫어했는데. 옷을 다시 단정히 정리하고 굳어있던 입꼬리도 검지로 눌러 풀고 나자 그제야 좀 꼴이 나아보였다.


연못께에 풀썩 쪼그려앉은 여는 신을 떠올렸다. 괜스레 코끝이 찡하고 눈가가 시렸다. 평생을 안타까워할 일이다. 왜 신이 이렇게 되었는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폐하를 볼 면목이 없구나.


"어‥!"


그때,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키려던 여가 휘청했다. 몸에 힘이 없었는지 혹은 발을 헛디뎠는지, 그만 그대로 물에 빠지고 말았다. 아무리 못 관리에 일조했대도 여가 그 깊이를 알리는 만무했다.

또 어렸을 때에는 왜인진 몰라도 쫓기는 신세였어서 곧잘 강물도 건너곤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물엔 발도 못 담그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수영을 못한다는 것이다.

차가운 물이 쉴 새 없이 호흡기관을 따라 들어왔다. 분명 발에 닿는 것은 있는데 딛지는 못하겠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나오는 건 눈물과 서러운 울음소 뿐이고.


"태보!!!"


머리마저 물속으로 가라앉으려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몸이 물 밖으로 냅다 끌어올려졌다.

물은 입에서 흐르는데 누워 눈 감은 채로 미동도 할 수 없었다. 아직 물속에 있는 기분이라면 기분이었겠지 도저히 뭍에 있단 게 믿기지 않았다.


"왕여, 왕여!"


신은 늘어진 여를 흔들었다. 언젠가 배웠던 소생법이 불현듯 스쳤다. 그 방법이 머릿속에서 엉망으로 섞였다. 좀 제대로 배워둘 걸. 신은 울상을 지으며 그저 기억나는 대로 여의 머리를 뒤로 살짝 젖히고 입을 가져다 대어 공기를 불어넣었다.


"‥ 왕여?"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눈꺼풀은 미동도 없었고 몸도 늘어진 채 그대로였다. 호흡도 점점 옅어져만 갔다.

하지만, 여는 아직 살아있었다. 검은 강을 앞에 두고, 건너편에서 무어라 외치며 손짓하는 아버지를 앞에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뿐이지.

아버지. 여는 결국 발을 그쪽으로 내디뎠다. 그때, 여의 귀에 들린 것이 있었으니,

여야, 여야, 내가 잘못했어. 제발.

그것은 곧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우는 소리였다. 그것은 곧 기억 속 한 소년의 울음소리와 겹쳐졌고 여는 검은 강에서 얼른 발을 빼어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왠지, 꼭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곧 빛이 기다리고 있으니, 곡소리도 가까워졌다.

평생 날 것 같지 않던 눈물이 흘러 떨어지려는 순간, 차가운 손이 눈꼬리를 쓸었다.


"저 안 죽었습니다‥. 울지 마세요."


그제야 신의 눈에도 살짝 뜨여진 까만 눈이 보였다. 속에서 울컥 무언가 올라오는 듯했다. 신은 저도 모르게 뭔가에 이끌려 다가갔고 둘의 입술은 잠시 닿았다 떨어져 나갔다. 그 짧은 순간, 신이 느낀 쾌감은 상당했다. 단언컨대 살아있음에 느끼는 감사, 환희 그 이상이었다. 코끝에 스치는 젖은 향조차 달게 느껴졌다. 제가 원했던 게 결국 이것이었던가. 신은 꿈속에서 제 위에 걸터앉아있던 하얀 몸을 생각했다.


"소생술, 잘 배우셨네요."


하지만 신의 품에 안겨 여전히 떨고 있는 그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소생술이라 말했다. 그의 눈이 예쁘게 접혔다. 그러자 신은 눈가의 눈물자국이 싹 말라 버리는 것을 느꼈다. 입맞춤, 이 사람에겐 아무런 느낌이 없구나.




7. 이음


그날 이후로 둘의 끊어진 관계는 다시 닿기 시작했다. 여는 돌아온 신을 정서적으로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런 여를 지켜보는 신은 더욱이 마음이 동해만 갔다. 어서 여가 제 '소생술'을 입맞춤으로 보는 날이 왔음 싶었다.


한창 수업 중, 신은 졸린 눈을 게슴츠레 뜨고 여를 바라보았다.


"‥ 칭찬은 잘해야만 있는 것이지?"


물론이지요. 그 말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히 대답하는 여의 모습이 그리 얄미울 수가 없었다. 공부하련 마음을 다잡기에는 더없이 좋은 대답이었지만 말이다.


드디어 그날이었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태사와의 책, 태자첨사부에서의 책, 모두 끝나는 날. 신은 오늘이야말로 밤을 지새워야 할 날이다, 결의를 다졌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려왔다. 하지 않던 공부를 이리 하니 머리가 도저히 따라주지 않아 속상할 뿐이었다. 또 공부는 공복에 해야 한다고 흘리듯 들은 여의 말을 따라 먹지 않고 반나절을 지내었더니 속이 메스껍고 쓰렸다. 시간이 어이 되었는지 조막만 하게 난 창으로 보이는 밖은 별이 총총 뜨고도 어슴푸레 새벽 빛깔을 하고 있었다.


이젠 태사나 여에게 배우는 것을 심화하거나 하여 태자 첨사부太子詹事府에서도 교육을 시켰다. 그러니 태자는 국자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것 하고도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했다.


공부에 거부반응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신은 책을 신경질적으로 덮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다시금 여의 입술을 떠올렸다. 입술을 자주 적시는 버릇 때문에 항상 젖어있어 야시시하고 붉은빛을 띠어 보고 있으면 입맛이 돌았다. 그리고 그것을 제 입에 물었을 때의 아찔한 감각도 떠올렸다. 신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며 샅으로 손을 뻗었다. 그것이 팔딱팔딱 뛰는 것 같았다.

젠장‥. 제 2의 심장이 있다면 여기 있는 것 같아. 신은 바지 앞섶을 풀어헤쳐 제 것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곧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랗게 말고 끝부터 조금씩 밀어 넣었다.

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생각에 그쳤다.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손짓 하나면 신에게 껄떡 넘어가는 여자들이 대령된다만, 그게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형님 폐하도 최근 들어 잠자리라곤 갖지 않는 신을 우려하는 기색을 내비친 바 있었다.


"너마저 후사가 없으니 더 이상 거둘 친족이 없구나‥."


남자로서의 기능에 문제가 생겼는지를 들먹이며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신은 그저 여와 하고 싶을 뿐이었다.


"후‥."


신은 옆에 놓여있던 흰 천으로 그가 뱉어놓은 희끄무레한 것들을 닦아내었다. 앞섶까지 여며 정리를 하고 나자 그제야 만족스러웠다. 신은 최종 목표를 곱씹으며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어째, 공부는 잘 되시던가요?"

"되고말고."


하얀 종이 위로 번져나가는 검은 선이 유려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뻗어나가는 획에 여는 그의 노력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탁.

온통 검게 변해버린 붓이 갈빛의 탁상으로 떨어졌다. 석 장하고도 반을 꽉 메운 검은 글씨들은 놀랍도록 책과 내용이 같았다.


"‥ 완벽하십니다."


여는 환희에 찼다. 말문이 턱 막혀 조화를 이룬 검은색과 흰색, 그것들을 바라보고만 있으니 신이 살풋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번엔 특급 칭찬이 필요하지 않겠어?"

"전하. 무엇인들 아니 되겠습니까, 무엇인들요."


그의 대답에 신의 눈이 빛났다. 무엇인들, 이란 말이지? 신이 여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가자 일어날 일을 어렴풋이 짐작한 여의 눈이 본능적으로 감겨갔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입에 하는 입맞춤 수준이 아니라 그 이상이고 그 이상이었다. 훅 가까워진 숨이 느껴지고 따뜻한 입술이 맞닿았다. 머리통을 붙든 손은 도저히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벌려진 입 사이론 숨, 그리고 다른 것들이 오갔다.

아찔한 감각이 스치고 얼굴이 불붙은 듯 뜨거워졌다.


"허으, 하‥. 전하‥."


신이 손을 놓자 여는 그대로 푹 주저앉아 그저 숨을 몰아쉴 수밖엔 없었다. 왜 이렇게 잘해. 왜 이렇게‥


"나 잘하지?"


천진한 얼굴로 입술가를 소매로 훔치며 씩 웃는 것이 어쩜 그리도 야살스러 보이는지. 신은 여전히 굳어있는 여를 향해 한 마디 덧붙였다.


"소원 하나 더 남았어."


신이 한 걸음 다가가자 바닥에 힘없이 앉아있던 여가 얼굴을 붉히며 파드득 몸을 뒤로 물렸다. 쿵. 벽에 등을 부딪히고 멈출 때까지 말이다. 무릎 한 쪽을 내려 눈높이를 맞춘 신이 목에 입술을 대어 살을 한 움큼 빨아들이자 그 저린 감각에 여의 눈 초점이 다시 돌아왔다. 차마 태자 전하를 손으로 밀어내진 못 하고 몸을 웅크리며 여는 외쳤다.


"아, 전하! 전하, 전하, 잠깐만요. 잠‥ 다른 소원 빌어주시면 아니 되시겠습니까."

"왜?"


돌아온 물음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더 했다간 제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단 말이 태자 전하 앞에서, 하물며 사제지간에 나와선 아니 될 말이니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신은 입을 꾹 다물고만 있는 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상황에서든 그랬지만 지금만큼은 제가 위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난 탓에 얼굴이 자만으로 가득 찼다. 곧 신은 부러 난감하다는 얼굴을 하더니 여를 향해 웃었다.


"제발요."

"‥제발요."

"그럼, 나들이 가자."


몇 년 만인가, 이 말. 스스럼없이 애원해 들은 말임에도 여는 괜히 옛 생각이 나 웃었다. 물론 기분도 썩 좋았다. 신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이번엔 궁 밖이야."

"예?!"



궁 밖이라니. 그것도 연등회 때에. 하지만 아니 되겠습니다 입을 떼자마자 달려든 신 탓에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내민 동의였다. 한 번 돌이켜 보니 그저 입술을 내어줄 것을 그랬나 후회가 들었다. 봉은사 행향行香을 다녀온 해가 항상 신부터 찾았던 것을 떠올리며 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비밀로 해.

그의 말이 언뜻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8. 연등


이날은 해가 일 년 중 가장 얼굴이 밝은 날이래도 과언이 아니었다. 궁의 안은 물론이오, 밖까지 온통 알록달록 연등으로 가득했고 사람들마다 입꼬리엔 미소가 번듯 걸려있었다.


해가 봉은사 행향을 가고 연등에 하나둘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2월의 그날 저녁녘, 여와 신은 도주를 시도했다. 왜 하필이면 연등회 날이냐 하면 단지 빛나는 궁 밖이 궁금했기 때문이란다. 궁의 바깥담과 동궁이 만나는 곳마저 알아왔으니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일 수도 있었다.

몰래 빠져나가기에 월담까지. 여가 세운 윤리적 상한선은 이미 다 넘었다.


"전하,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으응. 되고말고."



겨우 눈을 피해 밖으로 나온 둘은 감탄했다. 길마다마다 연등이 수놓았으며 어린아이들도 저마다 손에 연등 하나씩을 쥐고 웃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신과 여도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거리로 나온 신은 곧장 여의 손을 이끌어 색색의 옷이 화려히 걸려있는 한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궁 사람인 것, 너무 티 내는 것 아닌가?"


넌지시 던져진 그 말에 여가 제 옷과 신의 옷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신은 그 옛날 감찰 나가던 해의 모습처럼 선비복을 입었으나 저는 아직도 내관 옷차림이었다.


"한 벌 골라봐."

"진심이십니까‥?"


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8년, 궁에 들어온 이후로는 있대도 단 며칠뿐이고 도통 바깥 옷을 입을 일이 없었던 탓이었다. 신은 반색하며 옷들 사이로 총총 뛰어가는 여를 보곤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계집도 아니고 옷 한 벌에 저리도 신났담.


하얀 도포에 푸른 전복, 금 자수로 무언 문양이 수놓아져있는 허리끈과 깃. 딱히 눈에 띄지 않을 평범한 옷이었으나 여가 걸치니 꽤나 고풍스레 보였다. 신은 그제야 만족했단 듯 웃음을 띠고 밖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새 행렬은 시작되고 있었다. 아깐 미처 모두 켜져 있지 않았던 연등이 모두 켜져 거리의 밤은 낮처럼 환했으며 행렬 속 빛으로 다들 물들어 빛나고 있었다.



"아이고, 저기. 선비님,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말소리에 돌아본 여는 그만 빙긋 웃음 짓고 말았다. 저를 부른 듯 보인 아낙네의 옆에는 작은 아이 하나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것이 신을 본 첫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부탁이시기에 그러십니까?"

"글을 아시면 이 아이 소원을 좀 써주시옵사 하고‥"


자초지종이, 아이가 어디서 무엇을 보고 왔는지 여태껏 입으로만 빌던 소원을 연등에 꼭 써야겠다고 칭얼댄다는 것이었다. 달래도 되지 않고 어르어도 듣지 않는다고 아낙네는 훌쩍이는 아이를 붙들고 말했다.

아이의 소원은 작지만 큰, 그런 소원이었다. '행복하게 해주세요.' 목적어도 없이 막연히 행복하게 해달라는데 그 작은 소원이 어찌나 좋던지. 신이 부루퉁하니 딴짓을 하는 동안 여는 소원을 쓴 연등을 아이에게 건네었다. 그리고 연신 고맙다 하는 아낙네를 뒤로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전하, 저희도 소원 빌까요?"

"좋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행렬을 바라보며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 소원 뭐 빌었어?"

"전하 소원 이뤄지게 해달라 빌었습니다."

"뭔 줄 알고."

"이제 알려주시면 되잖습니까?"

"비밀이야."


신은 기분 좋은 얼굴로 여를 바라보았다.

그때, 행렬이 멈추고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이 연등을 높이 들어 길을 밝히며 몸은 내려 존경을 표하니, 길 끝에서부터 들어서고 있는 기다란 행렬의 시작은 왕해의 것이었다. 둘은 재빠르게 상점에 걸린 옷감 사이로 몸을 숨겼다. 환궁 행렬하는 도중에 길거리 사람들을 무엇 때문에 그리 자세히 살펴보겠냐만은 둘 다 눈에 안 띌래야 안 띌 수가 없는 장신의 별종이기 때문이었다.

옷감 사이에 둘러싸여 몸을 맞붙인 채, 여가 신을 쳐다보았다. 옷감 사이로 열심히 밖을 쳐다보던 신이 고개를 돌리니 안 그래도 비슷한 키 덕분에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여는 얼굴에 열이 훅 오르는 것을 느끼며 몸을 살짝 떼어내려 하였다.


"흐읍, 전하‥. 송구합니다."

"쉿."


하지만 여지를 주지 않는 신이었다. 그에겐 단지 옷감이 흔들리는 게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을지 모르겠지만 허리를 확 당겨 끌어안는 것이 여에겐 상당히 도발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자 행렬 소리가 잦아들었다. 밖을 한 번 더 확인한 신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여는 재빠르게 밖으로 튀어나갔다. 잔뜩 열이 올라 빨개졌을 얼굴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고 있자니 신이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얼굴 왜 그래요?"


같잖은 존댓말까지 쓰면서 말이다.


"저, 전하, 곧 폐하께서 찾으실 겁니다."


여는 급히 화제를 돌리곤 궁을 향해 몸을 돌렀다. 그렇게 둘은 관등을 위한 연등을 하나 밝히고 늘어지는 발걸음을 재촉해 궁으로 돌아갔다.




9. 낙화


"환복하시고 먼저 황궁으로 향하시지요. 폐하께서 찾으실 겝니다."


동궁의 침전에 다다른 여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틀린 말이 아니란 걸 충분히 인지한 신은 고갤 끄덕였다.


황궁 회경전會慶殿에 다다라 문 앞에 섰는데 안에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태사 조우. 신은 아랑곳 않고 문을 열으려 하려다가 멈추었다. 태자의 도착 사실을 알리려던 근장의 입마저 손수 틀어막으면서 말이다. 익숙한 단어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폐하, 태보 왕여가 감히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태자 전하를 위협해 궁까지 벗어나게 해‥"

"사실이더냐."

"동궁 별전을 뒤지면 변복에 쓰인 옷이 있을 겁니다."

"그럼 신이. 신이는 어디 있느냐!"

"동궁에 계실 겁니다."


그리고 이어진 해의 말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게 느껴졌다.

태보 왕여를 잡아들여라.


"‥ 태보 왕여를‥"


잡아들여라. 선정전宣政殿으로 간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근장이 왕명으로 불려 들어가고 신은 뛰었다. 지금쯤 동궁 별전에 있을 것이다.



"왕여-!"


이제 막 환복을 끝낸 여는 또다시 신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하지만 제가 기억하던 그때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여가 느낀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고 그걸 증명하듯이 설움에 북받친 울음이 들렸다. 길게 찢어지는 목소리가 여의 고막에 닿자마자 언제나 그랬듯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왜 그러시‥"


신은 여가 보이자마자 관복 사이로 허옇게 보이는 팔목을 잡아채 걸음을 빨리했다. 여의 발에 생채기가 나도, 신에게 잡힌 손목이 온통 붉게 물들어 고통을 호소해도,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선정전은 정치만 하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선정전은 중죄인의 처벌과 사형 여부를 가리는 곳이기도 했다.

여도 아무 말 하지 못 했다. 신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꾹 다물린 입은 그가 지금 분노나 슬픔이나 그 이상의 것에 휩싸여 있단 걸 뜻했다. 그래서 여는 발바닥이나 손목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작은 신음조차 내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을 뿐이었다.


"왕여!"


그의 이름을 부르는 또 다른 이가 있었으니, 왕명을 받아 죄인 왕여를 잡으러 온 근장과 해의 호위무사였다. 태자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처음엔 달려들더니 신이 버티고 서있자 그제야 그의 얼굴을 알아보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왕명을 받‥"

"알아. 아는데, 내가 데려가."

"하지만 그럴 순 없습니다."


호위무사의 손이 여에게로 뻗어지자마자 신의 고개가 바싹 처들렸다.


"건드리면 다 죽여버릴 것이야."


그 말엔 호위무사조차 주춤 한 발짝 물러나고 말았다. 당장 지금이라도, 안 되면 내일이라도 칼을 들고 찾아올 그 살기에 어쩔 도리가 없어 결국 신이 먼저 떠나고 나서야 그 길을 뒤밟아 간 그들이었다.


흰 버선이 흙투성이가 된 지는 오래, 그 사이로 작은 핏방울이 맺히고 사그라질 때 즈음 둘은 선정전에 도착했다. 해는 신을 보고 말이 없었다. 우가 대신 한 마디 하려고 한 발 앞으로 나서니 신의 눈이 뒤집혔다.


"왜, 왜!! 뭐라 한 마디 더 하려고. 또 이 사람이 날 협박했다고 할 것이냐? 허락 없이 궁을 벗어났다고 할 것이냐?"


신이 말하는 와중에도, 그리고 신이 말을 끝낸 후까지도 여의 눈은 그곳을 향해있지 않았다. 여의 시선이 닿아있는 곳은 선왕이었다. 언제 어떻게 이 소문이 연등회 동안 외전에 머물던 선왕에까지 닿았는지는 몰라도 신을 보아야겠다며 자리한 것이었다.

우에게 물러나라 손짓한 해는 신의 잔뜩 눈물이 고여 붉어진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 저리도 가까워졌단 말인가. 여에 대한 온갖 감정과 생각이 동시에 일다가 어느 순간 멈추고 말았다. 그의 태보 박중헌이 세상이던 그때를, 그리고 그 세상에게 모든 걸 바치고 모든 걸 잃었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선왕의 권력으로 태자 자리와 목숨은 지켰지만 가슴 한 편이 뻥 뚫려나갔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왕여를 끌고 가라."


그 말에 신은 선정전 내에 발을 떼는 놈이 있으면 죽여버리겠다는 살벌한 협박을 하며 여를 제 몸 쪽으로 딱 붙여 끌어안았다. 요지부동인 신과 주춤대며 눈치만 보는 아랫것들의 행보에 우가 나서려는 순간, 분노한 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가만히 있던 신이 입을 떼었다.


"다들 저를 왕신으로 알고 있지만 저는 김신입니다. 이 자는 왕여고요. 왕가의 성씨를 갖고 있으며 실제로 왕족입니다. 선왕 폐하의 아버지 외척 일가가 숙청했던 왕 씨 성의 세력에서 도망친 한 비의 아들이 왕여의 아버지입니다. ‥ 아실 텐데요."


신은 확신이 있었다. 선왕이 저를 데리고 왔을 때의 기억이 났고 네가 여의 대신이라던 그의 말도 생생히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신의 눈이 선왕을 향하자 해의 눈도 따라 그를 향했다. 곧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리고 정적이 시작되었다. 다들 하나같이 선왕의 한 마디만을 기다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해의 몸이 옥좌 위로 풀썩 떨어졌다. 신은 여전히 선왕만을 바라보고 있는 여를 슬쩍 흘기곤 해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러니 내치시려거든 저를 내치셔야 할 겁니다."

"안 된다!"


이번에 큰 소리를 내게 된 것은 선왕이었다.


"넌 내 자식이다, 신아. 태자, 태자이니라. 이미 신이는 태자이니라. 안 된다. 아니 돼. 해야, 네 형제다. 네 동생이야."


옥좌에 겨우 걸쳐져있던 해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리고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입이 다시 떨어졌다. 우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이를 까드득 갈며 해의 마지막 결단만을 기다렸다.


"없던 일로 하라. 그리고 여기서 나온 모든 말이 하나라도 밖으로 샌다면 어찌 될지는 알아서 판단하라."


해는 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친분이 있다 하여 이때까지 너무 봐준 것 같소. 앞으론 이런 일 없도록 하시오."

"‥ 예."



동궁 별전으로 들어서 신와 여 둘만 남게 되자 여는 참았던 눈물이 쏟아냈다.


"아버지가 기억이 났어. 흐윽, 너무나도, 닮아서‥ 아버지가‥"


그 기억은 벌써 몇 십 년 전의 것이었다. 집을 나서며 금방 다녀오신다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은 날, 어린 여는 강가에서 아버지를 찾았다. 그곳에는 물에 퉁퉁 불어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아버지가 있었다. 여는 아버지가 왜 어떻게 사라지셨는지, 왜 제가 물이라면 그렇게 기겁을 하며 피해왔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


"알아. 나도 다 아니까, 실컷 울어도 돼."


신도 분명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 장丈이 조금 넘는 깊지 않은 물에 여가 빠졌을 때에도 그렇게 미친 듯이 구한 것이었다. 물을 볼 때마다  여 자신도 모르게 서리던 공포를 신이 못 봤을 리가 없었다.

사실 여를 만나고 신은 몇 년이 지나서야 그 이름에 의문을 품었다. 과연 선왕이 제게 말했던 여가 왕여인가. 그리고 추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더해서 알게 된 사실이라면 관군이 여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이었다. 지나칠래도 지나칠 수 없는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 씨 일가의 한 사람을 죽였다.', '시체는 강으로 흘러 찾지 못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식 또한 찾지 못 하고 돌아왔다.'

여는 그렇게 신에 품에 안겨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10. 유수


시간이 흐르고 태사 조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잔류했으나 신은 떠났다.


"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연등회 날에 보았던 아이의 소원 기억나십니까?"

"행복하게 해주세요?"

"예. 황제가 된다면 그 소원, 전하가 들어주십시오. 만백성 평안하게 해주겠다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좋다."


다름이 아니라 황제 즉위가 시작된 것이었다.



"이제 태보는 필요 없으시겠네요?"


즉위식을 위해 구장복을 예쁘게 차려입은 신은 생각도 없이 여가 막 내뱉은 말에 구장복을 던져버릴 뻔했다. 하지만 그러진 않았고 대신 여의 귀에다 새로운 말을 속삭였다.


"태보는 필요 없지. 근데 왕여는 필요하니까  그냥 내 옆에 있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여를 두고 내관들 사이로 쏙 사라지니 여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 제 자리를 찾으러 갔다. 그동안 딱히 의식하지 않았는데 자리가 맨 앞줄이니 제가 정 1품이란 걸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곧 구장복을 입은 신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오늘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높을 곳에 꼿꼿이 섰다. 황제 즉위식이 시작되었다.


"오늘로 고려의 18대 황제 왕신이 즉위해 정사를 바로하고 사직을 받들 것을 알리는 바이다."


신이 몇 백 문무백관 앞에 서 성군이 되겠다 재차 선언하니 그날은 태자 김신이 황제가 되는 날이었다.

신은 웃었다. 내 소원도 이뤄질 것 같아. 그리고 태보 소원도.


봄이 갔으니 여름은 푸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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