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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학도]

춘향전

달 밝은 밤이었다. 학도는 술도 없이 술잔만 달랑 들고 뒤뜰로 나섰다. 그는 빈 술잔에 입을 대고 술을 넘기는 시늉을 연신 하며 뜰을 거닐었다.

취하고 싶다‥. 그는 아무 돌에나 걸터앉았다. 섬섬옥수 손끝에 간신히 매달려있던 술잔이 빙글 돌았다. 그리고 그 위태로움이 술잔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푸른 학이 하얀 하늘에 날아오르는 무늬의, 청아한 울림을 주는 잔이었다.


"학도."

"웬일이야."


학도는 저를 부르는 이를 반가이 맞았다. 그와 절친한 이몽룡이었다.


"내가 내일 한양으로 가는 건 아나?"

"알지."

"그러고도 말 한 마디 없다니,"


말을 뚝 멈춘 몽룡은 사람 좋게 웃었지만 갓으로 슬쩍 가린 눈에는 섭섭함이 묻어있었다. 학도도 모른 척 웃었다.

어젯밤, 학도는 망설이다 발걸음을 돌렸다. 몽룡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다. 다만 눈물이 자꾸 차서 그럴 수 없었을 뿐이다. 그가 떠난다는 그 사실이 성큼 다가올 것 같아서. 그리고 학도는 그날 진정으로 깨달았다. 몽룡을 사모하는구나, 하고. 이제 학도가 몽룡을 사모하고 있음은 무를 수 없는 사실이 된 것이다. 학도는 속으로나마 욕을 했다.

이렇게 학도는 남고 몽룡은 떠나야 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잘나디 잘난 덕에 학도는 이미 이 고을의 사또였으니. 떠나는 이, 몽룡은 학도의 잘 다녀오라는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온 길을 다시 밟아갔다.

꼭, 다시 보자.



몽룡 없는 일상, 평화롭기 그지없다. 학도는 절도죄로 제 앞에 잡혀온 천 것이 곤장을 맞는 걸 무심히 내려다봤다. 학도의 표정이 사랑을 잃었음을 여실히 말해주었다.

학도의 발 아래서 엉덩이가 부르트고 피가 나도록 맞은 천 것은 엉엉 울며 가족이 굶고 있노라 말했다. 관아 안에 있던 사람들 사이 에서 여기저기 어이구, 어이구 하는 안타까움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학도는 몽룡의 빈자리를 생각했다. 몽룡은 분명 자비를 베풀어라 조언했을 것이다. 그는 다시 빈자리를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옥에 쳐넣어라."


순간 싸늘해진 학도의 눈빛이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훑었다. 빈자리는 빈자리이다.

절도죄로 옥에 갔던 그 천 것이 풀려나는 날까지도 학도는 계속 빈자리만을 생각했다. 관아를 나서는 그의 슬픔가득한 얼굴을 보면서도 학도는 빈자리를 생각했다. 남의 슬픔을 싹싹 그러모아 담아도 채울 수 없는 빈자리였다.


학도는 방향을 잃은 새가 되어 방탕의 길로 스물스물 스며들었다. 그는 더 이상 빈 술잔을 들지 않았다. 술이 그득히 넘치는 술잔을 들었다.

의미없는 날이 흘렀다. 그 사이 바람은 두둥싯 새로운 소식을 싣고 왔다. 이 고을에 사는 아름다운 기생 이야기였다. 듣지 못했던 이야기에 학도의 귀가 쫑긋 했다. 빈자리를 채울 만한 또 신비스러운 것이 있으려나. 학도는 포졸을 불러다가 물었다.


"그 기생 이름이 뭔가?"


포졸은 대답했다. 춘향이라고, 성춘향.


"그럼 데리고 와봐라."


학도의 명에 포졸이 가서 춘향을 데리고 오려 했는데,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거절하고 또 하고 또 거절했단다. 아버지를 억울하게 옥에 가둔 변 사또라서 죽어도 싫다 한다고. 포졸이 후닥닥 뛰어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해대자, 학도는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저번에 본 천 것이 그녀의 아버지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자 술에 길들여진 못된 심성이 불쑥 나와 말했다.


"그럼 이번엔 데려오지 말고 잡아와라."


결국 끌려온 춘향이 관아의 메마른 흙바닥에 엎드리게 됐을 때, 학도는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납셨구나."


춘향은 학도의 비꼬는 듯한 말에 입술을 콱 깨물었다. 학도는 몹시 화가 난 그녀의 기색에도 아랑곳 않았다.


"내 수청을 들어라."

"싫습니다."


악에 받친 대답이 바로 날아들었다. 학도도 냉큼 말을 더했다.


"네 아비처럼 옥에 갈 터이냐?"

"차라리 그게 낫겠습니다."


학도는 웃었다. 오냐. 네 원한다면 그리 해주마. 나도 바라고 너도 바라니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지.


"저 년을 옥에‥"


학도의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관중 속에 숨어있던 거지가 비척비척 걸어나와 손에 쳐든 마패를 보자마자 그의 표정은 바싹 굳어버렸다.


"암행어사 출두요!"


아차 싶었던 걸까. 눈에 모래라도 들어간 듯이 눈알이 따끔댔다. 거지의 손에서 흔들리는 마패가 느리게 보였다. 그 거지는 얼굴에 묻은 검댕을 대충 닦다 말고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내 수청을 들어라."


학도의 얼굴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거지, 아니 어사의 올곧은 눈동자가 학도를 향하고 있어서였다. 춘향은 학도를 보며 픽 웃었다. 바람 새는 소리에 학도의 눈이 그녀를 향하자 얼른 웃음을 삼켰다. 학도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 다른 사람의 눈에도 퍽 우스운 광경이겠다.


"정녕 미친 게로구나. 암행어사가, 정녕 미쳤어."


학도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무심히 중얼대다 고개를 팽 돌렸다. 반면 여유로운 어사는 마패를 흔들며 관군들에게 말했다.


"저 놈을 내 수청을 들게 하든지, 아니면 함께 죄인으로 끌려가든지 알아서 해라. 다만 줄을 잘 서야 할 게다."


관군은 넋이 나가 있다가 황급히 학도를 붙들었다. 학도가 초점없는 눈으로 순순히 그들을 따라가자 어사는 춘향을 일으켰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오.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저 심술궂은 사또를 용서해주길 바라오."

"겉으로나마 그리하겠습니다."


춘향이 멈칫하는 듯하면서도 긍정의 대답을 하자 어사는 더러운 얼굴로 살핏 웃었다.


그리고 날이 어둑해질 즈음, 어사는 학도의 방으로 찾아들었다. 책을 들여다 보고 있던 학도는 기척을 느꼈음에도 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무심한 한 마디를 던졌다.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약속이니 와야 하지 않겠느냐?"


어사는 능글능글 웃으며 학도 옆에 철퍽 앉아 책을 든 학도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학도는 분노에 파르르 떨면서도 떨쳐내지 못하고 책을 꼭 붙잡기만 했다.


"내 얼굴을 봐주지 않겠느냐?"


학도는 책을 탁 덮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어사는 거지꼴 대신 말갛게 씻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학도는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몽룡...?"


그에게 잡힌 손에서 땀이 났다.


"어, 떻게..."


몽룡이었다. 진짜 몽룡. 학도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몽룡이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큰 실수를 했나? 엄한 사람에게 벌을 준 게야?"


학도는 고개를 설설 저었다. 맞잡은 손에 따스한 열기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몽룡은 학도가 황급히 손을 빼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내가 엄한 사람에게 벌을 준 게 아니라면 수청은 마저 들어야지."


학도는 몽룡의 못된 장난과 같은 말에 확신이 들었다. 그도 내 마음을 알고 있다.


"언제부터 내가 널 사모한다는 걸 알았지?"

"네가 네 마음을 알았을 때부터."


학도가 헛웃음을 지어보았다. 몽룡은 되었다 말하며 그에게로 다가섰다. 뻣뻣하게 굳은 허리를 부여잡고 끌어당겼다. 키스를 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었다. 부드러운 키스는 자연스럽게 목을 타고 몸을 따라 내려갔다. 깔끔했던 옷 매무새가 한껏 흐트러지고 마른 어깨가 드러났다. 내가 떠나고 너는 많이 아팠더냐. 몽룡은 딱 그렇게 물었다. 학도는 아파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되레 몽룡의 입에 키스를 했다. 몽룡이 웃었다.

몹시 아팠나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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