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 자박, 자박. 나직한 발소리가 빈 문에 울렸다. 이 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신이 없는 동안 여가 돌봐왔던 석남사가 나왔다. 안에는 여전히 신과 누이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다만 여의 것은 없었다.


신은 간밤의 비로 단단하게 얼어붙은 얼음 눈 위로 앉았다. 자연스레 손가락이 바닥을 향하자 그는 손가락 끝으로 눈 가운데를 눌러 구멍을 만들었다. 금세 눈이 녹아 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그는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그 옆의 눈사람은 차마 건드리지 못했다.

너마저 녹아버린다면‥


친구 이상의 돈독한 관계를 나누었던 그가 고려 황제 왕여였다는 것을 알게 된 그날, 신은 이곳에서 여의 목을 잡아채었다. 그리고 그 흰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질리도록 손에 힘을 주었다. 죽으라고, 죽으라고 그랬다.

시간이 흐르는 게 무색하게 하루하루 되살아나는 혈족들의 혈향에 신은 완전히 질려있었다. 사랑한 그라 해도 쉽게 용서할 수 없으리란 건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 그 후, 신과 여는 그 관계를 잃었다. 매일매일이 숨 막히는 정적으로 흘러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는 신의 방문을 두드렸다.


 "나, 떠나."


어디로.

어디로든.


그땐 미처 몰랐다. 여가 주어진 형벌, 죽은 삶을 끝내고 신이 겪었던 그곳으로 갔다는 걸. 신처럼 선택의 순간이 주어질지, 아니면 평범한 인간처럼 무조건적인 환생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삶이 더 남아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신은 눈사람에 서툴게 박힌 당근을 꾹 눌렀다. 비에 녹아 형태가 일그러진 눈사람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이 눈사람은 여가 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것이었다. 그처럼 조용히 이곳에 앉아 찬 눈을 긁어모아서 동그랗게 뭉쳤겠지. 그랬을 여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르는 듯하였다.

보고 싶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눈사람의 녹은 머리끝이 자꾸만 눈앞을 아른아른 스쳐 볼에 눈물길을 만들어냈다.

당분간은 못 오겠다.


*


"꽃 지도입니다. 서울에는 이른 꽃이‥"


이젠 도깨비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아도 꽃이 핀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던 신이 천천히 봄 코트를 챙겨 입었다.


문을 열자 또다시 익숙한 전경이 펼쳐졌다. 다만 눈이 없었다 뿐이지. 신은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계단을 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계단을 타고 흐르는 작은 물줄기에 불안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이리라. 계단 끝에 다다르자 비로소 눈사람의 남은 형체가 눈에 들어왔는데, 겨울의 마지막 자락을 억지로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물웅덩이 중간에 홀로 남아있는 작은 눈 덩어리가 참 처량했다.

이젠 계단에 앉으면 산보다도 희게 피어있는 매화가 눈에 들었다. 봄이 오지 않았으면, 차라리 그랬으면 하고 그렇게나 빌었는데 결국 봄은 왔다.


"조금 있으면 철쭉이 필텐데.

그게 그렇게 예쁘다?"


석남사는 철쭉이 예쁘다. 아직 잎도 돋지 않고 앙상한 채로 있는 철쭉 가지가 문득 눈에 들어 한 소리였다. 그때 꼭 다시 보러 올게. 신은 눈사람과 약속을 했다.


*


철쭉이 피는 날 다시 보러 오겠다 한 신이었다. 옛날 여와 함께 봤던 그 정경은 그대로 아름다웠고 봄기운이 물씬 스쳤다. 신은 늘 앉던 계단에 앉았다. 이제 눈의 흔적이라고는 아무리 다시 보아도 남아있지 않고 눈사람의 일부였을지도 모르는 앙상한 나뭇가지 조각만 남아있었다.

이번에도 눈물이 났다. 이것은 절대 참을 수 있는 눈물이 아니라고 신은 확신했다.


해가 푸른 산 끝에 닿아갈 때 즈음, 석남사를 찾은 또 하나의 발길이 있었다. 마침내 석남사의 유일한 발길들이 마주하자, 꽃잎들이 우수수 떨고 피어나기 시작했다.


"‥ 보고 싶었어."

"나도."


길게 늘어지는 석남사의 일몰 뒤로 두 개의 그림자가 느리게 떨어졌다 합쳐졌다. 이젠 봄이 와도 괜찮을 것 같아.


연고님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