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뽑고 선택으로써 얻은 영생에 지루해진지는 벌써 100년도 넘었다. 짧고 굵게, 짧고 굵게, 그렇게 4번의 생을 다 살고 소멸한 사랑스러운 도깨비 신부도 더 이상 볼 수 없으니 지루하다 뿐이겠는가.


"한 줄로."


하지만 신은 몇 달 전부터 재미있는 놀거리를 찾은 참이었다. 오늘은 너. 그는 눈을 부릅뜨고 제 앞에 선 저승사자들을 살폈다.


몇 달 전이었다. 수호신이란 예쁜 명분도 잃은지 오래, 신은 평소와 같이 반쯤 감긴 눈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은 저승사자 무리. 웬 시커먼 녀석들인가 했다.

물론 그들이 그 자체로 즐겁고 재미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들이 신에게 바치는 무조건적인 복종이 그렇게나 즐거웠던 것이지. 수호신의 자리는 저승사자라는 말단의 자리에 비교도 되지 않게 엄청난 권력을 쥐고 있었다. 사실 그에게서 수호신의 자리를 박탈한 것은 그 스스로일 뿐이지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그가 수호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신은 몇 주에 한 번, 그들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조용히 끼어 미모 깨나 되는 저승사자들을 성별 가리지 않고 지분거렸다. 그들은 예민했으나 반항하지 않았고 그때의 신은 그 정도에 충분히 만족했다.

일은 신의 손이 사자 열 명 정도를 거치었을 즈음에 터졌다. 그것은 가장 높은 급의 사자를 건드린 후였다. 비록 남자였지만 신은 그게 메인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얀 피부에 빨간 입술, 심지어는 다 쓰는 이름 김차사가 아닌 고운 이름까지 있댔다.

그러나 오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신을 기다리던 그들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상황을 알아챈지 얼마 되지 않아 신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삐져나왔다.

이 새끼들‥


파르륵, 불붙는 소리와 함께 신의 온몸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올라 그가 디딘 땅을 바싹 말렸다.


신은 원령을 불러내었다. 원령, 그것은 저승사자보다도 더 막 대해도 되는 존재였다. 그는 슬금슬금 모여든 원령들 중 가장 어린 녀석의 모가지를 잡아채었다.


"아흐, 아윽!"


원령들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파리하게 질렸다. 신은 때를 놓치지 않고 서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저승사자를 찾아내."


신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원령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끝까지 쥐고 있던 어린 원령의 모가지까지 풀어주자 비로소 신 앞에 얼쩡이던 원령들까지 그것을 데리고 사라졌다.

5분가량이 지나자 원령들 중 가장 키가 큰 놈이 돌아왔다.


"저기, 저기 끝에‥ 폐병원이 있어."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도시가 아닌 조그만 주택들이 들어찬 곳이 보였다. 그리고 흐릿하지만 삐죽 올라온 회색 건물도 있었다. 폐병원이란 아마 저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 멀리도 갔다. 그래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만, 씨발.

작게 비웃은 신은 위치를 겨냥하고 공간을 훌쩍 뛰어넘었다.


*


그 시각, 차사들은 분주했다. 도깨비의 행패에 마음 다친 이가 벌써 손가락 수를 훌쩍 넘어갔다. 하지만 이렇게 그들이 자리를 피하게 된 이유는 오로지 저들의 수장과도 같은 왕여이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도깨비가 저승사자 무리로 끼어들더니 가만히 앉아있는 여의 옆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것이었다. 한껏 신난 도깨비가 여의 목덜미를 쓸기 시작하자 차사들은 웅성웅성 떠들기 시작했다. 다들 여의 강한 반항을 예상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입술을 꼭 깨문 여는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도깨비의 손이 한참을 여기저기 훑다 멈추더니 갑자기 여의 이마로 가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내일 또 봐."


촉, 도깨비의 입술이 여의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도깨비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여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이고 사라졌다.

도깨비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의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또 까만 바지 위로는 시커먼 눈물자욱이 번져나갔다. 눈물을 본 한 차사가 옆의 이에게 귀띔을 하자 제각각 떠들던 차사들 사이로 침묵이 전염되어 퍼져나갔다. 여는 아랑곳 않고 가슴을 부여잡고 울었다. 차사들은 그런 여를 보고 그가 수치심에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왕차사, 며칠 동안만 여길 뜨자."

"안 돼."

"도깨비가‥"

"안 돼."


차사들에겐 여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다. 다년의 경력으로 저승부의 기둥으로 우뚝 선 여는 차사들의 자존심이었으며 존경 그 자체였으니까. 그까지 도깨비에게 그런 모욕을 당한다면 참을 수 없게 되는 건 여 쪽이 아니라 차사들 쪽이었다.

결국 그들은 사랑을 명분으로 여에게 약을 먹였다. 다만 인간의 약이라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는 확신은 없었는데 의외로 효과가 좋았던 것이다. 쓰러져 잠든 여를 두고 차사들은 당황하더니 이내 그를 들쳐 업어 종종 그들의 안식처가 되어주던 폐병원으로 향했다.


*


어느 순간부터 잠들어있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깨어있었는지 그 스스로도 잘 몰랐다. 그저 하얀 천장이 보였고 제가 침대 위에 누워있다는 것만 자각했을 뿐이었다. 여는 한동안 아무 말도 내뱉지 않고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작은 말소리가 들리더니 여전히 흐린 시야로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찼다. 동기 김 차사와 후배 김 차사, 그리고 김 차사들이었다. 맙소사.


"너네‥"

"조용해. 넌 저승부의 마지막 자존심이야."


여는 당황스러웠다. 그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그들의 명예를 위해 이용당하는 것까진 생각도 못 해봤던 탓이다.

허수아비. 너덜너덜해져서는 사람들 손에 농락당하던 전생이 다시 되살아나 덮쳐오는 것 같았다. 여는 그 옛날처럼 조용히 입을 다물었지만 마냥 그렇게 있을 계획은 아니었다. 여는 신에게 가야 했다. 그가 다시 보고 싶었다.

그들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여는 늘어진 몸을 이끌고 침대가 가득한 병실을 빠져나갔다.


*


"찾았다."


그 누구도 관리하지 않은 듯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는 병원 앞뜰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검은 옷을 입은 이들 몇이 평화로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신은 부러 발을 크게 구르며 다가가 비로소 그를 쳐다보면 주저 없이 목을 비틀어버렸다. 죽을 수 없는 고통에 몸서리치는 그의 꼴이 꽤나 보기 좋았다. 도망치는 사자의 등에는 병원에서 쓰는 두꺼운 파일을 꽂아주었다. 피가 사방으로 튀기고 그도 앞쪽으로 꼴사납게 엎어졌다. 저승사자에게도 피가 있구나. 신은 손에 튄 피를 칙칙한 벽면에 문질러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1층에는 그들이 없다는 걸 깨달은 신은 느린 발걸음으로 계단을 향했다.

계단을 반쯤 올랐는데 위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페이스를 유지하며 코너를 돌자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저승사자들이 보였다. 신의 심기가 조금 뒤틀리기 시작했다.


*


꿈은 오래가지 못 했다. 곧장 여의 부재를 알아챈 그들이 여의 목덜미를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여는 악을 쓰며 병원 비상계단의 문에 매달렸다. 눈물이 막 났다.


"신아‥ 신‥"


여가 없는 힘 다 끌어내며 악을 쓰자 결국 한 차사가 주사기에 뭔가를 가득 넣어왔다. 그리고는 여의 팔을 잡더니 마구 찔러 넣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주사 놓는 방법에 대해 배웠을 리가 없는, 언젠가 배웠더라도 잊은 게 분명한 그가 아무 곳에나 주삿바늘을 찌르고 액체를 주입하기 시작하자 팔 살갗이 뜯어져 상처로 덮이고 부어올라갔다.


"하아, 이 새끼들."


뭔가의 등장에 놀란 차사들이 여를 놓고 뒤로 물러서자 여가 앞으로 꼴사납게 꼬구라졌다. 누가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무조건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든 여는 앓는 소리를 하며 몸을 일으켰지만 순간 머리채가 잡혀버렸다. 여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채를 잡은 손을 따라 움직였다.


"똑바로 봐. 네가 도망치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눈앞에서 동료들의 머리가 후드득 떨어졌다. 잘린 목에선 피가 솟구치고 떨어진 머리에 달린 차사들의 눈코입이 고통에 울었다. 물론 사死가 허락되지 않은 저승사자라 다시 붙기야 하겠지만 그 고통만은 온전해 큰 충격으로 남을 것이 뻔했다.


"으‥"


여는 투여된 약에, 눈앞 끔찍한 광경의 충격에 이기지 못하고 그만 꼴깍 넘어가고 말았다.


*


신을 친히 이곳까지 오게 한 그가 기절해버려 몸이 축 늘어지자 신은 그의 머리채 대신 팔목을 잡았다. 바닥의 잘린 머리가 신의 발에 채이자 앓는 소리를 내었지만 아랑곳 않고 신은 손목을 잡은 채로 끌고 비상구로 내려갔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갈 때마다 늘어진 몸체가 계단 모서리에 부딪혀 쿵쿵 소리를 냈다. 신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갔다.


먼지 쌓인 집이 눈에 들어오자 신은 눈쌀을 조금 찌푸렸다. 모처럼 손님이 왔는데 이렇게 더러워서야.


"손님이 왔어."


신은 허공에 대고 외쳤다. 그러자 쓰지 않는 가구들에 덮여있던 하얀 천들과 그 주위로 쌓여있던 먼지들이 나풀나풀 날리다 사라졌다. 언제 생각해도 좋은 능력이었다.


* *


하얀 천장은 여전했다. 또한 그가 침대 위에 누워있다는 사실도 여전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이곳이 병원이 아닌 단란한 가정집의 안방쯤 될 것이란 생각이 문득 솟구치자 여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유난히 가벼운 듯한 몸에 행색을 살피니 일어서면 허벅지까지는 올 큰 후드티가 걸쳐져 있었다. 여는 훤히 보이는 맨다리에 놀라 웃옷을 훌렁 들었다. 다행히도 속옷은 입혀져 있었고 누군가 손을 댄 흔적 또한 없었다. 그제서야 한숨을 쉬고 주위를 둘러보자 그를 둘러싼 모든 게 낯설었다. 언젠가 들렀던 차사들의 집 중 하나도 아닐뿐더러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자세히 살펴본 이곳은 감히 박봉의 저승사자들이 넘볼 수 없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일어났네."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나자 여는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어느새에 나타난 신이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는‥"

"내 집. 앞으로는 우리 집."


우리 집‥ 여는 신의 말을 곱씹었다. 신은 덤덤한 여의 반응에 의외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곤 뒤로 돌아섰다. 신의 뒷모습을 보자 여는 처참한 몰골이던 동료들이 문득 떠올랐다.


"저, 잠ㄲ‥"


‥?

철컹, 여가 움직이려 하자 소리는 다시 한번 울렸다. 신이 한쪽 입꼬리를 쭈욱 끌어올려 웃음을 보였다. 여는 천천히 소리가 난 곳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손목에 구속구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줄 끝은 침대 헤드 쪽에 매어져 있었다.


"몰랐어?"


여는 축 늘어져있는 왼쪽 손목을 오른손으로 주물렀다. 아까의 약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곳엔 감각이 없었다. 여는 신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은 방 안에 있던 펜을 염력으로 들어 여의 손목을 겨냥했다.

푹, 날카로운 펜촉이 여의 손목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핏줄기가 툭 터졌지만 여의 입에선 단말마의 신음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단지 여는 눈을 크게 뜨고 신과 제 팔을 번갈아 보았다.


"아아, 아직 감각이 안 돌아왔구나."


간단한 실험을 마친 신은 웃으며 방을 나갔다. 여는 손목에 꽂힌 펜을 뽑아 침대 옆 탁상에 내려두었다.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상처가 신경을 건드렸지만 이를 악물고 벌어진 살을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는 참고 견뎌야 해.


*


차사들의 머리에서 피가 다 뿜어져 나오고 슬슬 몸이 마르고 가벼워져 굳기 시작할 즈음에 또 다른 부서인 구원부가 도착했다. 그들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평사였다. 그들은 완전히 활동을 멈춘 차사들의 머리를 주웠고 옮기기 쉽도록 팔과 다리를 절단해 상자에 담았다.

천계에 다다라 솜씨 좋은 김평사가 검디 검은 실로 동강난 팔다리를 꿰매고 목을 붙였다. 이런 참담한 저승부의 소식이 알려지자 염라가 한달음에 달려와 누구의 짓이냐 다급히 물었으나 구원부도 이 일을 알 리가 없고 대답할 수 있는 이도 하나 없었다. 그야말로 전멸이었다.

비틀어져 누워있는 차사들을 하나씩 확인하던 염라는 긴 시체 행렬의 끝에 다다라 우뚝 멈추어 섰다.


"여. 왕여는 어디 갔지?"

"목록엔 김차사란 이름뿐입니다."


평사가 보고했으나 염라는 여전히 멈춰있을 뿐이었다. 왕여란 이름 덕분에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단 한 명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도깨비.


염라는 저승부를 새로 꾸려 손실된 인원을 충당하고 소수 정예로 신계 밀정을 책임질 엘리트를 끌어모았다. 그들로 하여금 도깨비를 잡고 왕여를 구출하게 할 생각이었다.

망할 도깨비.


"팔다리를 잘라 상자에 담아 오거라."


"


그 후 며칠간 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죽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아 고통스런 몸은 여를 점점 옥죄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에 신은 손과 팔에 피를 묻힌 채 돌아왔다. 팔뚝까지 걷어올린 흰 셔츠에는 가까스로 피가 닿지 않아있었다. 신이 여가 쪼그리고 앉아있는 침대에 앉는 순간까지 여는 신의 팔을 주시했다. 신은 그 시선을 느끼고는 여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왜. 신경쓰여?"


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신은 엄지손가락을 여의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신은 여가 밀정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확신했기에 그렇게 담담한 얼굴을 하는 게 파렴치하다고 생각했다. 심기가 뒤틀렸다.


"그럼 빨아주든가."


여의 혀가 경직돼 안으로 말려들어가자 신은 엄지손가락을 빼고 검지와 중지를 여의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입안에는 온통 피의 비린 맛으로 가득했다. 구역감을 느낀 여가 조그만 반항의 의미로 신의 손을 잡고 끌어내자 신은 더욱 짖궂게 여의 혀를 쓸어내렸다.

힘겹게 켁켁거리던 여가 고갤 들기 무섭게 다른 것이 여를 덮쳐왔다. 신은 여에게 가볍게 입을 맞춘 후 곧장 목에 이를 박아넣었다.


"아흑‥"


여가 고통에 몸부림치자 손목을 붙들고 있는 철 조각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마치 살을 떼어 먹을 것처럼 여의 목을 물어뜯던 신은 결국 피를 보고서야 그 짓거리를 멈추었다. 소름끼치는 미소를 보여준 신이 바지 버클을 풀어내리고 다시 다가오자 여는 주춤 물러서다가 눈을 감았다.


"왜 반항하지 않아?"

"사랑해서‥"


이번엔 소리내어 웃었다. 비웃고 있는 것일까. 신은 한동안 웃더니 여의 머리채를 잡고 자신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어떻게 하는지 알잖아."


그의 말에 살며시 눈을 뜬 여는 눈앞의 그것을 조심스레 입안에 담았다.


*


또다시 구원부로부터 상자를 받게 된 염라는 그것을 열어보곤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상자에 담겨온 것은 도깨비의 잘린 몸뚱어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몸뚱어리이긴 몸뚱어리인데 제 사랑스런 밀정원들의 말라 비틀어진 몸뚱어리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끝이 참담했다는 건 충분히 보았다. 염라를 잠식한 것은 이전과 다른 종류의 분노였다.


"내가 직접 가겠다."


*


끼익.

곧 돌아온 그의 손에는 굉장히 의외의 것이 놓여있었다. 과일과 채소 수프였다. 제가 채식주의자인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육류와 해물류 따위의 것은 눈을 씻고 찾아보고도 없었다.

침대 끝에 접시들이 가볍게 놓이자 여는 파드득 경련했다. 그는 배가 너무 고팠다. 하지만 손을 뻗어도 구속구에 다른 한 쪽 손을 잡힌 터라 그것들은 닿지 않았다. 신은 그것을 여 쪽으로 밀어주는 대신 과일을 하나 집어 들어 그에게로 뻗었다. 여는 과일을 손으로 받아드는 대신 입 바로 앞에 와 있는 그 과일을 마른 입술로 조심스레 감싸 물었다. 단내가 끼치고 입안에 부드러운 과즙이 감돌았다. 신은 과일을 삼키고 어느새 다음 것을 기다리고 있는 여를 보며 입꼬리를 느리게 끌어올렸다.


"이렇게 묶어놓고 밥 주니까‥

애완동물 같아."


그 인격모독적인 말에 고개를 떨군 여는 웃고 말았다. 그럼에도 신이 전혀 밉지 않고 기분도 한 끗 상하지 않았단 사실이 제 죄를 더욱 무겁게 만드는 것 같아서였다. 신은 그런 여를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미친놈."


*


체념한 듯 웃고 있던 그 모습이 아무래도 걸렸다. 아무리 미친놈 소리를 많이 들어봤다지만 제가 해본 것은 처음이었던 듯싶다. 낯익은 듯한 그 실없는 웃음이 자꾸만 머릿속 어딘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 불쾌함이 갈수록 더해지자 신은 맥주를 꺼내왔다. 막힌 것들이 모두 뻥 뚫릴 것만 같은 맥주 캔 따는 소리가 나고 목구멍으로 그것을 털어 넣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렇게 한 캔을 비우고 안주나 삼자 해서 구운 달걀을 까고 있을 때 즈음, 눈앞에 이상한 게 보였다. 그것은 검고 흐릿한 연기 따위로 보였다.


"뭔지, 뭔지 모르겠네."


형체가 조금씩 돌아오고 점차 인간의 형태를 하자 신은 눈에 힘을 주고 쳐다보았다.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누군지는 그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저번 그놈들을 내가 다 죽여서 염라가 직접 납시었구나. 아른아른 올라오던 술기운이 확 깨었다. 그의 살기나 분노가 이 먼 거리에서도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도 알 수 있었다.


"도깨비."


염라가 서늘한 목소리로 신을 부르자 그는 구운 달걀 대신 검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염라도 품에서 긴 은빛 검을 꺼내 쥐었다. 신은 웃었다.


"죽이시려면 그때 죽이셨어야지요."


*


분명 신 말곤 아무도 살지 않는다 여기었던 집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신의 것이 아닌 낯익은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채자마자 여는 푸드득 떨었다. 그리고 신을 위하여 풀 시도도 않았던 그리고 약 기운과 상처 때문에 풀지 못 했던 구속구를 풀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풀렸을 때, 여는 정말 미친 듯이 방문을 열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그가 다다른 거실에는 날카로운 쇳덩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낭자했다.


"왕여!"


눈이 마주치자 염라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여를 불렀다. 하지만 여를 등지고 선 신은 여를 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신이 동작을 멈춘 것은 일순간이었다.


"왕여‥?"


칼끝이 점점 땅을 향하고 신이 여를 향해 돌아봤다. 그리고 신의 뒤에선 염라의 칼날이 떨어지고 있었다. 눈물 맺힌 여의 눈에 그 장면이 비쳐 떨어졌다. 팔이 잘려나가고 피가 솟구쳤지만 신은 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시 한번 염라의 칼이 들어올려지자 여는 신에게로 달려가 그를 감싸 안았다.


"제발, 제발 그러지 마요‥."


여의 머리 바로 위에 멈춘 칼은 상당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신은 남은 한쪽 손을 들어 여의 얼굴을 쓸었다. 신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네 이름을 말해봐‥."

"왕여‥."

"다시‥"

"왕여‥."

"왕여. 여, 여야."


잊고 있던 그 이름이.

왕여.

다시 생각났다.

이제야 제 앞의 이가 누군지를 알 것 같았다. 지난 시간 제가 그렇게 지독히도 괴롭혀온 이가 누군지를.

신이 휘청 쓰러지자 여는 그를 받아안으며 그들을 주시하고만 있는 염라에게 다그쳤다.


"구원부를 보내주세요. 구원부를."


신의 잘린 팔이 방금 마지막 경련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염라는 신을 끌어안는 여를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안다. 전생의 작은 그 잘못 때문에 그 아이를 싸고도는 거라면‥"

"그게 어찌 작은 잘못입니까. 그게 작은 잘못이면 600년 동안 겪은 지옥은 뭐가 됩니까. 신이가 이제까지 겪은 또 다른 지옥은 뭐가 되느냔 말입니까!"


염라에게 소리친 여는 먹지 못해 말라 틀어진 손으로 식어가는 신의 볼을 수차례 쓰다듬었다. 나는 하루라도 그대가 눈을 감고 누워있는 꼴을 못 보겠어‥.


"김평사."


염라가 드디어 입을 떼었다. 순식간에 나타난 김평사는 익숙하게 검은 실로 신의 팔을 꿰매기 시작하였다. 금세 검은 실이 녹아들어가고 새로운 살이 돋았지만 신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여의 애처로운 눈빛이 허공을 멤돌다 평사에게로 향했다. 평사는 한숨을 푹 쉬곤 뒤돌아섰다.


"피가 모두 돌고 나면 눈을 뜰 겁니다."


그렇게 여는 며칠이고 거실에 누운 신 곁에 빛을 밝히고 온기를 지키며 지내었다.


*


희뿌연 안개가 온통 발밑을 덮고 있었고 저 멀리에는 내가 사랑한 황제가 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웃으며 달려온 어린 여가 신에게 안기는 순간, 그조차도 안개가 되어 바닥으로 숨어버렸다.


"아, 어헉."

"신아‥."


그리고 눈앞에는 다른 왕여가 있었다. 지난 일 제가 한 잘못들이 스쳤고 눈물이 났다.


"미안해. 미안‥ 내가‥ 내가‥"

"정말 다 괜찮아‥."


여는 신이 안타깝게 뻗은 손을 잡아 그를 일으켰다.


"아직도, 이런 나를 사랑해?"

"응.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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